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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참 의미!
고통이란 무엇인가 ? 이 문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괴롭혀 온 인류 전체의 문제이며 모든 종교가, 사상가, 시인 문학가, 예술가들에게 풀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썼으며 얼마나 많은 고행자들이 이 고통을 이겨보려고 자기 몸을 괴롭혔겠습니까?
인간의 고통이란 평안, 만족과 반대되는 주관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고통이란 인간이 피조물, 즉 조건적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사람의 체온은 36.5도 정도를 유지해야 되는데 이런 조건이 맞지 않으면 곧 고통을 느낍니다.
바다 속 깊이 잠수할 때 분당 17-19회 정도 숨을 쉬어야 적당한 양의 산소가 공급됩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갈 때는 수압에 의하여 산소가 질소로 변하므로 질소마취 현상이 일어나지요,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은 현상이 통증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해병대 전우들이 동해안에서 scuba 로 수중 산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고 멋있는 탐색이지요, 내가 수색대장 당시 스쿠버와 스키전술에 대한 교범 (400폐지)을 만들어서 3급인가를 받아 사용을 하였고, 당시 특전사 정호영 중장, 장세동 준장님과 대관령 설한지 스키 전술 훈련 중 용평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책에 대한 설명을 하니 그 책을 특전사에도 교범으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여 여러 권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상적인 사람도 잠수하다가 통증의 신호가 오면 즉시 중단하고 물방울을 따라 서서히 상승하여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인간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조건들이 유지되도록 경고해 주는 경고등입니다.
사실인즉 고통 없이 인간은 살기가 힘듭니다. 마치 자동차나 비행기에는 여러 가지 계기와 경고등이 장치되어있습니다. 연료가 떨어져 가면 그 사실을 계기판에 나타남으로 연료를 보충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계기가 없다면 한참 잘 가다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오래전에 콜럼비아호가 내리는 Mojave 사막과 그 위에 있는 death ,죽 음에 사막을 가봤습니다. 여름에는 계기판을 무시하고 가다가 차가 고장 나서 무서운 더위에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면서 반드시 2-3대 이상 같이 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차량의 계기판으로 알려주는 것을 무시하면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고통을 주관적으로 느끼는 기능은 생물 중에서 고등동물입니다, 마치 고급차일수록 계기판이 많이 장치되어 있는 것과 같지요, 식물은 아마 통증이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고통이란 주관적인 인식내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고등동물과 특히 인간에게 더 나타납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 필요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장에도 폐, 간 같은 장기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생기는 이상은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생리작용으로 해결되며, 인체 내에서 생명유지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기는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아니하고, 간뇌의 통제 하에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더 많이 주어진 "선택보조기구"입니다. 만약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이 자기 생각대로 산다면 자체에 법칙을 가지고 있는 물질 환경에서인체는 상처를 받게 되고 얼마 못가서 죽게 될 것입니다. 위가 비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목이 타도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시간 마다 진찰을 받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잠 잘 때도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면 질식해서 죽게 되므로 마음 놓고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체적인 인간이 객체인 환경 속에 살면서 자신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선택(행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선택 보조 기능으로서 고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마련 입니 다.
고통이 있으므로 그것을 피하다 보면 저절로 만족과 건강을 보전케 됩니다. 그러나 고통을 알지 못하면 동시에 만족과 기쁨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려고 행동하는 그 자체가 살려고 하는 것이며 동시에 평안과 만족을 구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평안을 얻으려는 행위 즉 금욕주의적인 태도도 어떤 면에서는 의미는 있으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치관과 행동에는 반드시 주관적으로 고통과 평안의 문제가 관련되어있습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고통은 생명을 보전키 위한 인간에게 주어진 안전장치입니다. 술을 냄새만 맡아서 간을 헤친 사람은 없고, 술을 많이 마셔서 간이 상한 사람이 주로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술을 먹으면 더 아프기 때문에 더 이상 술을 먹지 못한다면 그 고통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연기할 수 있는 축복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을 하기 때문에 고통은 인생의 낭비 즉 타락을 결국 막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방탕하여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에게 고통으로 더 이상 그 짓을 못하게 하십니다.
내가 요 얼마 전 10여년 만에 처음 감기로 몹시 고생하였다가 날 즈음에 또다시 음식이 넘어가지 못한 알레르기 증세로서 한 달간 병원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지금은 좋아져 가고 있습니다만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허리가 36인지인데 34로 줄었지요, 이런 고통으로 인해 음식도 절제하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싸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것들을 주워 먹는 버릇을 억제하다보니 혈당과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좋은 성도가 저절로 성장한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 나름대로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신앙은 저들의 고통이란 거름위에서 자랐기 때문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이란 이 세상의 미련을 버리게 합니다. 인생 말년에는 고통과 손실의 연속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 육신 안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저 하늘에서 영광스런 부활 때, 이 썩어질 육신 밖에서 하나님을 볼 때 영원히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욥은 결 국 자신의 이 위대한 부활의 소망을 ( 신앙) 고백함으로써 자기 안에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아무리 좋은 것을 선택해도 육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에는 궁극적으로 소망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에 소망을 바라보며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믿게 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우리의 속은 날 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려 함이니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고통스런 현재의 몸) 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신령하고 영화롭고 강한 몸으로 부활(고전15:42-44))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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